
들어가며 — 이런 일,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8,000만 원을 주고 도로로 써도 된다는 합의서까지 받았는데, 10년이 지나고 나서 '그건 그냥 쓰라고 한 것이지, 영구적으로 권리를 준 게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동산 분쟁을 다루다 보면 이런 상황을 마주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공장을 짓기 위해 진입로를 확보하고,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수년간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해왔는데 — 정작 등기(공식 권리 기록)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이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사건의 핵심입니다.
2025년 10월, 대법원은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한 판단을 내렸습니다(대법원 2025. 10. 16. 선고 2025다212847 판결). 이 글에서는 그 사건을 중심으로, 토지 통행로 합의서를 둘러싼 법적 분쟁에서 토지 소유자와 토지 사용자 각각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실무적 관점에서 풀어드리겠습니다.
1. 사건의 배경 — 맹지에 공장을 짓기 위한 진입로 확보
맹지란 무엇인가요?
'맹지(盲地)'란 도로에 직접 접하지 않은 토지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사방이 다른 사람 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차가 들어갈 수도,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도 없는 땅입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반드시 도로와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맹지 소유자는 인근 토지 소유자에게 통행로를 내달라고 부탁하거나 돈을 주고 사용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원고(공장을 짓고자 한 회사)는 부산 기장군의 맹지(G 토지)에 공장을 신축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도로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근의 H 토지와 F 토지(피고들 소유)를 통해 진입로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합의서의 내용
원고 측이 용역을 맡긴 주식회사 I은 2010년 12월 16일, 피고들의 대표자인 피고 D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습니다.
- 피고들 토지 중 약 88평을 진입 도로로 사용하는 데 동의
- 그 대가로8,000만 원지급
- 도로 조성 비용, 분할 등기 비용 등 모든 비용은 원고 측 부담
- "이 합의 내용은 일부 토지에 대한 공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도로점용에 한한다"
또한 피고들은 별도로 원고에게 "건축허가에 필요한 도로로 사용함에 동의한다"는 토지사용 승낙서도 작성해 주었습니다.
원고는 8,000만 원을 지급하고 2013년 2월 공장을 완공했으며, 이후 F 토지 중 163㎡ 부분을 통행로로 계속 사용해왔습니다.
2. 문제의 발단 — 10년이 지나서야 소송이 시작된 이유
"등기는 나중에 하면 되겠지"의 함정
공장을 짓고 나서 원고는 10년이 넘도록 별다른 문제 없이 그 통행로를 사용했습니다. 피고들도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23년 9월, 원고는 갑자기 소송을 제기합니다.
왜 이제야? 아마도 피고들이 토지를 팔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거나, 원고 회사의 사정이 바뀌면서 공장 부지의 권리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생겼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당장 문제가 없으니 나중에 정리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나중에 큰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경우를 실무에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임차권, 나중에는 지역권?
원고는 처음에 "임차권설정등기를 해달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임차권(賃借權)이란 쉽게 말해 '돈을 내고 빌려 쓸 권리'입니다. 그런데 1심 재판장이 "이 합의서는 임대차계약이 아니라 지역권 계약으로 볼 여지가 있으니 청구 내용을 바꿔보라"고 권유했고, 원고는 이에 따라 지역권설정등기 청구로 변경했습니다.
지역권(地役權)이란 내 땅(요역지)의 편익을 위해 남의 땅(승역지)을 일정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권(物權), 즉 등기부에 기록되는 강력한 권리입니다. 임차권과 달리 지역권은 토지 소유자가 바뀌어도 계속 효력이 유지됩니다. 이것이 원고가 지역권을 원하는 이유입니다.
3.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나 — 1심, 2심, 대법원의 엇갈린 결론
1심·2심: "지역권 설정 합의가 있었다"
부산지방법원 1심(2023가단344227)과 2심(2024나50964)은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피고가 피고 소유의 토지에 도로를 개설하여 원고로 하여금 영구히 사용케 한다고 약정하고 그 대금을 수령한 경우, 위 약정은 지역권 설정에 관한 합의라고 봄이 상당하다." (대법원 1980. 1. 29. 선고 79다1704 판결 참조)
1심과 2심은 ① 사용 기간에 제한이 없었고, ② 8,000만 원이라는 상당한 금액을 지급했으며, ③ 장기간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들어 지역권 설정 합의가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 "좀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 파기환송
그러나 대법원은 달리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은 법률행위 해석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법률행위의 해석은 당사자가 그 표시행위에 부여한 객관적인 의미를 명백하게 확정하는 것으로서, 사용된 문언에만 구애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내심의 의사가 어떤지에 관계없이 그 문언의 내용에 의하여 당사자가 그 표시행위에 부여한 객관적 의미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대법원 2009. 5. 14. 선고 2008다90095, 90101 판결 참조)
그러면서 대법원은 지역권 설정 합의를 인정하기 어려운 다섯 가지 사정을 지적했습니다.
① 합의서 어디에도 '지역권'이라는 단어가 없다
합의서와 토지사용 승낙서에는 지역권이나 다른 용익물권(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권리)을 설정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② 존속기간이나 등기 절차에 관한 약정이 없다
합의서에는 단순히 "도로로 사용하는 데 동의하고 8,000만 원을 받는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 어떻게 등기를 할 것인지에 대한 정함이 없습니다.
③ "도로점용에 한한다"는 제한 문구가 있다
합의서에는 오히려 "이 합의 내용은 일부 토지에 대한 공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도로점용에 한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④ 10년이 넘도록 지역권 설정을 요구한 적이 없다
원고는 8,000만 원을 다 지급하고도 소송을 제기할 때까지 10년 이상 피고들에게 지역권을 설정해달라고 요구하거나 항의한 사실이 없습니다.
⑤ 원고 스스로도 처음에는 임차권을 주장했다
원고는 소송을 낼 때 임차권설정등기를 청구했다가 1심 도중에야 지역권설정등기로 바꾸었습니다.
대법원은 이러한 사정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지역권 설정 합의를 인정한 원심에 법률행위 해석에 관한 법리 오해가 있다고 보아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부산지방법원에 돌려보냈습니다(파기환송).
4. 이 사건의 또 다른 쟁점 — "10년이 지났으니 권리가 사라진 것 아닌가요?"
소멸시효란 무엇인가요?
'소멸시효(消滅時效)'란 권리를 오랫동안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사라지는 제도입니다. 일반적인 채권(돈을 받을 권리 등)은 10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완성됩니다. 피고들은 "지역권설정등기청구권도 채권적 청구권이므로 합의서 작성일인 2010년 12월 16일부터 10년이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심의 판단: "실제로 사용하고 있으면 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
2심은 이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근거는 부동산 매수인이 목적물을 인도받아 사용·수익하고 있는 경우 등기청구권은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는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대법원 1976. 11. 6. 선고 76다148 전원합의체 판결)입니다.
이 법리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땅을 사서 실제로 쓰고 있는 사람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등기를 아직 못 받았더라도 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 2심은 이 원칙이 지역권설정등기청구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
원고가 2010년 12월부터(또는 적어도 2011년 10월 공장 신축 착공 이후부터) 현재까지 해당 토지를 통행로로 계속 사용하고 있으므로, 소멸시효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이 소멸시효 쟁점에 대해서는 별도로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환송심(다시 심리하는 재판)에서도 이 부분은 유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5. 토지 소유자라면 —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Q. 우리 땅을 도로로 쓰라고 합의서를 써줬는데,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나요?
A. 네,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합의서에 '지역권'이라는 단어가 없더라도, 법원이 그 합의서를 지역권 설정 합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① 사용 기간에 제한이 없고, ② 상당한 금액을 받았으며, ③ 상대방이 실제로 오랫동안 사용해왔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실무적 조언:
- 합의서를 작성할 때는 반드시 사용 기간, 사용 목적, 사용 범위를 명확히 기재하세요.
- "도로점용에 한한다"는 문구만으로는 지역권 설정 합의를 완전히 차단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 상대방이 등기를 요구할 경우를 대비해, 합의서에 "물권(등기되는 강력한 권리)을 설정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 합의서 작성 전에 반드시 부동산 전문 변호사의 검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Q. 이미 합의서를 써줬고 상대방이 10년 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사용을 막을 수 있나요?
A.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소멸시효도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법원이 지역권 설정 합의를 인정할 여지도 있습니다. 다만 이 사건의 대법원 판결처럼, 합의서의 문언과 당시 경위를 꼼꼼히 따져보면 지역권 설정 합의가 부정될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전략이 달라지므로 전문가와 상담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6. 토지 사용자라면 —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Q. 돈을 주고 합의서를 받았는데, 지역권 등기를 안 해도 괜찮은 건가요?
A. 절대 괜찮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합의서를 받고 돈을 지급했더라도, 등기를 하지 않으면 그 권리는 언제든지 분쟁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토지 소유자가 바뀌면 새 소유자에게는 합의서의 효력이 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무적 조언:
- 통행로 사용 합의를 할 때는 반드시 지역권설정등기까지 마쳐야 합니다. 합의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 합의서에 "지역권설정등기 절차를 이행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가능하면 합의 직후 등기를 완료하세요.
- 이미 합의서만 있고 등기를 하지 않은 상태라면, 지금이라도 상대방과 협의하여 등기를 마치거나, 필요하면 소송을 통해 등기를 청구하세요.
- 이 사건처럼 10년이 지난 후에 소송을 제기하면, 합의서의 법적 성격을 둘러싼 복잡한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Q. 환송심(다시 심리하는 재판)에서 원고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대법원이 지적한 다섯 가지 반대 사정을 정면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증거와 주장이 필요합니다.
- 합의서 작성 당시 당사자들이 '영구적으로 도로로 사용하기로 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할 것 (관련자 증인 신청)
- 8,000만 원이 단순 임대료가 아니라 영구적 사용권 취득의 대가였음을 보여주는 자료 (당시 인근 토지 임대료 시세와의 비교 등)
- 10년간 등기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이미 사실상 통행로를 아무 방해 없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설명
- "도로점용에 한한다"는 문구가 '임대차가 아닌 도로 목적의 사용에 한정'한다는 취지임을 주장
7.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 부동산 합의서, 이것만은 꼭 확인하세요
부동산 관련 합의서를 작성할 때 많은 분들이 "서로 믿으니까 대충 써도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신뢰는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토지 소유자가 바뀌기도 하며, 예상치 못한 분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8,0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주고 합의서까지 받았지만, 등기를 하지 않아 10년 뒤 대법원까지 가는 분쟁이 된 사례입니다. 부동산 관련 합의를 할 때는 반드시 다음 사항을 확인하세요.
체크리스트:
- 합의서에 사용 기간, 사용 목적, 사용 범위가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가?
- 지역권설정등기 등 물권 설정 절차가 포함되어 있는가?
- 합의서 작성 후 가능한 한 빨리 등기를 마쳤는가?
- 합의서 작성 전 부동산 전문 변호사의 검토를 받았는가?
유사한 통행로 분쟁, 맹지 진입로 문제, 토지사용 승낙서 관련 사안을 다수 다뤄온 경험에서 보면, 이런 분쟁의 대부분은 처음 합의 단계에서 조금만 더 꼼꼼하게 서류를 작성했더라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며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했으므로 부산지방법원에서 다시 심리가 진행될 것입니다. 환송심에서는 합의서의 법적 성격, 즉 지역권 설정 합의인지 단순 채권적 사용 허락인지를 더 꼼꼼히 따지게 됩니다.
이 사건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합니다. 부동산 관련 합의는 반드시 등기로 마무리해야 한다. 합의서 한 장이 10년 뒤 대법원 판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부동산 법률의 냉정한 현실입니다.
통행로 분쟁, 맹지 진입로 문제, 지역권 관련 사안으로 고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상담을 통해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조언을 드릴 수 있습니다.
본 게시글은 대법원 2025. 10. 16. 선고 2025다212847 판결, 부산지방법원 2024. 4. 23. 선고 2023가단344227 판결, 부산지방법원 2025. 4. 17. 선고 2024나50964 판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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